명나라
중국의 왕조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대명국(중국어 간체자: 大明国, 정체자: 大明國, 병음: Dà Míng Guó 다밍궈[*])[2] 또는 대명(중국어 정체자: 大明, 병음: Dà Míng 다밍[*]),[3] 약칭 명(중국어 정체자: 明, 병음: Míng 밍[*])은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존속한 중국의 통일왕조로, 한족계 반란군 주원장이 원을 중국에서 몰아내고 세운 마지막 한족 왕조이다. 홍무제와 영락제의 재위 시기에 거대한 운하와 수로가 건설되어 농업 생산력이 크게 향상되었으나 이후 만력제와 천계제와 같은 암군들이 나오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고 후금의 거듭되는 침략으로 쇠퇴했다. 이후 명나라의 황족과 유신들은 남쪽으로 후퇴하여 남명 정권을 세웠으나, 고질적인 내분과 무능함으로 결국 1662년 경 청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4]
대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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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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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남경(1368~1421) 북경(1421~1644) | ||||||||||||||||
정치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
황제 1368년 ~ 1398년 1402년 ~ 1424년 1627년 ~ 1644년 | 홍무제(초대) 영락제 숭정제(말대) | ||||||||||||||||
국성 | 강서 주씨 | ||||||||||||||||
역사 | |||||||||||||||||
• 성립 | 1368년 | ||||||||||||||||
• 멸망 | 1644년 | ||||||||||||||||
지리 | |||||||||||||||||
1415년 어림 면적 | 6,500,000 km²[1] | ||||||||||||||||
인문 | |||||||||||||||||
공용어 | 한어 | ||||||||||||||||
공용문자 | 한자 | ||||||||||||||||
민족 | |||||||||||||||||
인구 | |||||||||||||||||
1644년 어림 | 70,000,000명 | ||||||||||||||||
경제 | |||||||||||||||||
통화 | 대명보초 | ||||||||||||||||
종교 | |||||||||||||||||
국교 | 유교 | ||||||||||||||||
기타 종교 | 불교, 도교, 이슬람교, 천주교 | ||||||||||||||||
기타 | |||||||||||||||||
현재 국가 | 중화인민공화국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러시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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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제는 당시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었던 농촌 지역들을 발전시켜 엄격한 사회 제도 내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통하여 군사력 증강을 꾀하였던 것이다.[5] 이같은 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명나라는 백만 명에 달하는 상비군을 소유하고 난징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군항을 짓는 등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게 되었다.[6] 홍무제는 원나라를 교훈삼아 환관들, 그리고 재력가들의 영향력을 최대한 줄이고자 하였고, 장자 계승 원칙을 확립함과 동시에 후대의 황제들을 위하여 황명조훈을 집필하여 절대적인 황권을 구축하려 노력하였다. 허나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건문제가 정난의 변으로 인하여 쫒겨나고 연왕 주체가 영락제로 즉위하며 점차 이같은 장자 계승 원칙은 점차 무너지게 되었다. 영락제는 베이징으로 수도를 천도하였고, 자금성을 지었으며 대운하를 정비하였고 과거제를 재시행하였다. 그는 환관들을 주로 등용하여 신권을 잡고 있던 유교 사대부들을 견제하려 들었고, 결과적으로 환관들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이 환관들 중에서는 정화의 원정으로 유명한 환관 정화도 있었다. 정화는 인도양을 건너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까지 다녀오며 명나라의 권위를 해외에 과시한 업적을 남겼다.
명나라는 영락제 사후부터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정통제가 토목의 변으로 오이라트족에게 잡히면서 명나라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고, 해군력은 정부의 무관심 속에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명나라는 대신 노동력을 징발하여 유조변과 만리장성 등을 개축하였고 북방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큰 성과는 내지 못했다. 명나라는 세제를 개혁하고 정치제도를 개편하는 등 일련의 개혁조치들을 취했으나 세금을 회피하려는 사람들과 고착화된 관료제 등으로 인하여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명나라 후기에는 인구가 거의 1억 6천만 명에서 2억 명에 달하였으나,[7] 수탈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면세 혜택이 있는 환관들이나 사찰들로 대거 자발적으로 들어가면서 정작 중앙 정부의 세입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또한 이 때에 명나라 조정은 왜구들과 해적들의 약탈을 피하기 위하여 해안 지방에 해금령(海禁令)을 내려 해외 무역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16세기에는 점차 유럽의 팽창적인 해외 무역 정책이 중국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명나라는 마카오와 같은 항구들에서만 이들과의 교역을 제한적으로 허가하였는데, 이 항구들을 통하여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수많은 작물들이 국내로 유입되었다. 이 때 고추가 들어와 쓰촨 요리에 큰 영향을 주었고,[8] 생산성이 매우 높은 고구마와 감자 등이 새롭게 경작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기근과 가뭄의 영향이 크게 줄어들었고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상인들은 유럽에서 인기가 높은 중국제 상품들을 사가기 위하여 아메리카 대륙, 일본 등에서 들여온 은을 명나라에게 대금으로 지불하였다. 이렇게 유입된 은은 명나라의 경제를 대대적으로 촉진하였으며 나중에는 세금을 은으로 걷을 정도로 사회를 풍족하게 만들었다. 다만 초기에 유교 정통론자들은 상업이 발달하여 사회에서 농업을 밀어내고 주요 산업으로 떠오르는 것에 반대하였으나, 왕양명 등의 개혁가들이 더 관용적인 양명학 등을 개창하며 점차 반발이 줄어들었다. 이후 소빙하기로 인하여 농업 생산이 줄어들고 유럽 세력들이 중국에 지나친 양의 은이 유입되는 것을 막는 정책을 펴며 명나라의 경제에도 어느 정도 타격이 있었으나, 재상 장거정이 일부 성공적인 개혁 조치를 펼치며 진정되었다. 하지만 장거정이 세상을 떠나자 명나라는 전염병, 가뭄,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들에 시달리며 사회가 급격히 불안정해졌고,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결국 농민 출신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하여 순 왕조를 세웠고,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자금성 경산에서 목을 매 자살하면서 명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고야 만다. 이후 이자성의 반란군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게 무너졌고, 청나라가 새로운 중화 대륙의 통치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