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의 집권
클레오파트라 7세의 집권기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고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시기 중 클레오파트라 7세의 집권기는 그녀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시작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는 바로 이전의 파라오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로 기원전 51년 3월에 사망하였다. 클레오파트라의 집권은 기원전 30년 8월 10일 또는 12일에 그녀의 죽음으로 끝났다.[주해 1] 클레오파트라 재위 이후 이집트는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고 헬레니즘 문명은 끝을 맞이했다.[주해 2]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와 다른 영토를 전제군주로서 다스렸으나,[4] 집권기 동안 끊임없이 로마의 내정 간섭을 받아야 했다. 전제정은 아케메네스 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당시의 이집트를 정복했던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3세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설립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부터 내려온 전통이었다.
클레오파트라와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공동 파라오로서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둘 사이의 반목으로 인해 내전이 발발했다.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48년 시리아 속주로 달아났으나 이듬해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맞설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로마의 정치가였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그의 라이벌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맞붙었다가 기원전 48년 패배한 이후 당시 로마의 종속국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의 이집트로 도망쳐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폼페이우스를 펠루시움에서 살해한 후 참수하여 카이사르에게 보냈고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해 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다. 카이사르가 로마 공화국 집정관의 권한으로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를 화해시키려 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섭정 포테이노스는 카이사르가 건 조건이 클레오파트라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 아킬라스, 그 다음에 가니메데스가 아르시노에 4세(클레오파트라의 여동생)의 통치 하에 이끈 프톨레마이오스 군대는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를 모두 궁정에서 포위했다. 기원전 47년 초기에 구원병이 도착해 포위를 뚫었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나일 전투에서 패주하던 중 사망했다. 아르시노에 4세는 결국 에페소스로 추방당했고, 카이사르는 독재관으로 선출된 후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이집트의 공동 지배자로 공표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사적인 관계를 계속해서,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로 출발하기 전 아들 카이사리온(훗날 프톨레마이오스 15세)을 낳았다.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46년과 44년에 종속국의 여왕으로서 로마로 여행을 가서 카이사르의 별장에 머물렀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의 암살 후에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이 그의 상속자로 지명되도록 시도했다. 카이사르의 종손이었던 옥타비아누스(기원전 27년 초대 로마 황제에 오른 이후 아우구스투스로 알려짐)가 이 계획을 무너뜨렸다. 그러자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살해하고 그녀의 아들인 카이사리온을 공동 통치자로서 내세웠다. 기원전 43-42년에 있었던 리베라토레스의 내전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편에 섰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와의 개인적인 친분을 쌓았고 결국 그와의 사이에서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쌍둥이, 프톨레마이오스 14세 필라델푸스 세 아이를 낳았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요청대로 아르시노에 4세를 처형하기 위해 삼두정으로서 그의 권한을 사용했다. 그는 파르티아 제국과 대아르메니아 왕국을 침공할 때 자금과 군사 지원 면에서 모두 클레오파트라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이런 안토니우스의 로마-파르티아 전쟁은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그는 아르메니아를 점령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아르타와스데스 2세(영어판)를 포로로서 기원전 34년 알렉산드리아로 호송했다. 이 사건은 안토니우스가 권력을 이용해 자신과 클레오파트라 사이의 자식들에게 여러 영토를 줬던 알렉산드리아 봉헌 이후에 벌어졌다. 클레오파트라는 "Queen of Kings"(왕 중의 여왕)으로, 카이사리온은 "King of Kings"(왕 중의 왕, 왕중왕)이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이 사건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혼과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인 소 옥타비아의 이혼과 함께,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전쟁으로 이어지는 전환점이 되었다.
선전용 전쟁에 뛰어든 이후 기원전 32년,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원로원에 있는 안토니우스의 협력자들을 몰아내도록 압박을 가했다. 그는 더 이상 공직자가 아니고 일반 로마 시민이었던 안토니우스에게 불법으로 군사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클레오파트라에 선전포고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연합 해군을 꾸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 군의 장군이었던 아그리파와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아그리파가 승리하여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펠로폰네소스를 거쳐 최종적으로 이집트까지 도망쳤다.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의 군대가 이집트를 침공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저항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그들을 물리쳤고 안토니우스는 결국 자살했다.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를 로마에 포로로 압송하여 개선 행렬에 이용하기로 계획한 것이 명백해지자 클레오파트라는 독을 사용해 자살했다. 가장 널리 믿어지는 자살 방식은 그녀가 독사에 물리는 식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