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1945년 8월 6일, 8월 9일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을 마무리하기 위해 일본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사건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한국 한자: 広島・長崎原子爆弾投下, 영어: Atomic bombings of Hiroshima and Nagasaki, 일본어: 日本への原子爆弾投下)는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내기 위해 1945년 미국은 일본에 두 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는데 8월 6일 히로시마시에 한 개의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8월 9일 나가사키시에 나머지 한 개의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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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일본 본토 공습의 일부 | |||||||
히로시마-왼쪽/나가사키-오른쪽 원폭 투하로 형성된 버섯 구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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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캐나다 | 일본 제국 | ||||||
지휘관 | |||||||
윌리엄 스털링 파슨스 폴 티베츠 찰스 스위니 프레더릭 애시워스 | 하타 슌로쿠 | ||||||
병력 | |||||||
제509혼성부대 1,77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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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네덜란드인, 영국인 포로 20명 사망 |
히로시마
나가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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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 두 개를 떨어트리기 전까지 6개월간 미국은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도시 67개를 공습했고 영국, 대만과 함께 미국은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강요했으나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다.
결국 1945년 8월 6일 월요일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명령하여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가 히로시마에,[1][2] 3일 후 8월 9일 "팻 맨"(Fat man)이 나가사키에 투하됐다.[3] 원자폭탄 투하가 결정된 히로시마는 당시 일본군 제2사령부이면서 통신 센터이자 병참 기지였으므로, 일본의 군사상으로 중요한 근거지였다.[4]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고 초기 2개월에서 4개월 동안 히로시마에서는 90,000명에서 166,000명, 나가사키에서는 60,000명에서 80,000명 정도가 사망했으며[5] 그 중 각 도시 사망자 절반은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당일에 집계되었는데 히로시마 의료기관은 원폭투하 탓으로 60%가 섬광화상으로, 30%가 건물 잔해물로, 10%가 기타 원인으로 죽었다고 한 이 보고가 있은 후 다음 달에 더 많이 죽었는데 이는 원폭투하 탓에 후폭풍과 피폭과 기타 질병 합병증과 부상 탓에 발생했다.
그리고 미국에선 이 사건이 최단기에 가장 많은 시민을 죽였다고 평가하였고 15%에서 20%가 피폭으로, 20%에서 30%가 섬광화상으로, 50%에서 60%가 질병과 부상으로 죽었다고 보고했는데[6] 사망자들 중 대부분은 일본 시민들이었다.[7][8][9]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지 6일이 지난 8월 15일 일본은 마침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으며 9월 2일 항복 문서[10]에 사인하면서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알렸다.
한편 독일은 이미 5월 7일 유럽에서 항복을 선언했고 이 원폭투하로 인해 전후 일본은 "핵무기를 만들지 않으며, 갖지 않으며, 들여오지 않겠다"는 비핵 3원칙을 수용했으며 이 항복으로 인해 아시아의 일본 식민지들은 자동적으로 독립하게 된다.[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