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히 츠빙글리
스위스의 신학자 (1484–1531)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울리히 츠빙글리(독일어: Ulrich Zwingli, 1484년 1월 1일~1531년 10월 11일) 또는 훌드리히 츠빙글리(Huldrych Zwingli)는 스위스 종교개혁을 이끈 지도자 중 한 명이다. 쯔빙글리라고도 한다. 루터, 장 칼뱅과 함께 아울러서 종교 개혁의 거두로 평가된다. 츠빙글리가 역설한 신학의 핵심은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며 그 권위는 어떠한 종교회의나 교부들의 주장보다도 더 높다는 것이다.
울리히 츠빙글리 Ulrich Zwingl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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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84년 1월 1일(1484-01-01) 스위스 서약 동맹 빌트하우스 |
사망 | 1531년 10월 11일(1531-10-11)(47세) 스위스 카펠 |
교파 | 개신교, 츠빙글리주의 |
빈 대학교와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학술적 중심지인 바젤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는 글라루스와 아인지델른에서 목사로 일하면서 공부를 계속했고, 그곳에서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1519년에는 취리히에 있는 그로스뮌스터의 뢰트프리스터(인민의 사제)가 되어 가톨릭 교회는 개혁되어야한다는 자신의 사상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1522년에 작성한 〈67개 신조〉에서는 사순절 기간에 금식하는 관습을 비난했고, 이후 저서를 통해 교회 계급의 부패를 지적하고, 성직자의 결혼을 장려했으며, 예배에 그림이나 형상을 사용하는 것을 공격했다. 종교 개혁에 대한 그의 가장 주목할 만한 공헌 중 하나는 1519년부터 마태오의 복음서에서 시작해 신약성경 전체를 강론한 것으로, 후에 주석도 출판하였다.[1] 재세례파들을 비난하여 그들이 박해받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역사학계에는 츠빙글리가 취리히를 신정국가로 만들었는지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다.[2]
종교 개혁은 스위스 연방의 다른 주(칸톤)로 확산되었지만, 몇몇 주는 가톨릭을 지지하며 저항했다. 츠빙글리는 종교적 노선을 따라 연방을 나누는 개혁된 칸톤 연합을 형성했다. 1529년, 양측은 일촉즉발의 순간까지 도달했지만 겨우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한편, 츠빙글리의 사상은 마르틴 루터 등 다른 개혁가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마르부르크 회의에서 만나 많은 교리에 동의했지만, 성찬의 실재론 교리에 대해서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531년 츠빙글리의 동맹은 가톨릭 칸톤에 식량 봉쇄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츠빙글리가 전장에서 사망하자 가톨릭 칸톤은 공세를 펼쳤다. 그의 유산은 오늘날 개혁 교회들의 고백, 전례 등에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