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즈버그 7월 1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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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즈버그 7월 1일 전투는 남군 북버지니아군(로버트 리 장군 지휘)과 북군 포토맥군(조지 미드 소장)의 일부 부대가 게티즈버그에서 1863년 7월 1일에 시작한 전투로, 곧바로 대규모 전투로 발전했고, 수적 압도당한 북군이 게티즈버그 남쪽 고지대로 후퇴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첫째 날 전투는 전투 현장으로 다른 부대들이 꾸역꾸역 몰려오면서 3가지 국면으로 진행되었다. 오전에 헨리 히스 사단(A. P. 힐 소장 군단) 소속의 2개 여단이 존 뷰퍼드가 지휘하는 말에서 내린 북군 기병대에 의해 전진을 제지당했다. 존 레이놀즈 소장이 지휘하는 북군 1 군단의 보병 증원부대가 도착하자, 남군의 챔버스버그 파이크를 향한 돌격은 격퇴되었으나, 레이놀즈 소장은 남군 저격병에 저격을 당해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후 1군단의 지휘권은 애브너 더블데이가 인수했다. 오후 초, 북군 11 군단이 도착했고, 북군의 위치는 마을의 서쪽에서 북쪽으로 반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리처드 S. 이월의 남군 2군단이 북쪽에서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 로버트 로즈 사단은 오크 힐에서 공격하고, 주벌 얼리 사단은 마을 북쪽 개활지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북군 방어선은 바로우 고지의 돌출부를 뺐기긴 했어도 남군의 거센 공격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전투의 3번째 국면은 로즈가 북쪽에서 공격을 재개하고, 히스도 윌리엄 펜더 소장 사단과 함께 서쪽에서 전체 사단 병력으로 돌아와 공격을 재개했다. 루터 신학교 능선 근처와 오크 능선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로 결국 북군 방어선은 붕괴하여 하워드의 11군단이 먼저 후퇴하기 시작했고, 우측이 텅 비게 된 1군단도 뒤이어 뒷걸음질 치게 되었다. 북군 병력 일부는 수많은 사상자와 포로를 남겨놓고 마을을 지나 후퇴했고, 다른 이들은 간단히 후퇴했다. 북군은 묘지 언덕에 방어에 유리한 지점을 점령하고 진지를 구축하여 추가 공격에 대비했다. 11군단장 올리버 하워드가 사전 수배해놓은 예비대가 후퇴하는 북군을 수습했다. 이때 로버트 리가 내린 "가능하다면" 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에 이월은 공격을 선택하지 않았다. 역사가들은 그가 가능하다면이 아니라 해야 한다고 했다면 전투 결과가 어떻게 달라졌을 것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여왔다. 그런 논쟁과 상관없이 이월은 그 날 고지를 공격하지 않았고, 이 고지들은 뒤늦게 전장에 도착한 북군이 전열을 가다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