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시프 스탈린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1878–1953)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러시아어: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듣기 (도움말·정보), 조지아어: იოსებ სტალინი, 1878년 12월 18일 ~ 1953년 3월 5일)은 러시아의 정치가, 공산주의 혁명가, 노동운동가이자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 정치인, 작가, 시인, 언론인이다.
이오시프 스탈린 Иосиф Сталин იოსებ სტალინ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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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서기장 | |
임기 | 1922년 4월 3일 ~ 1952년 10월 16일 |
전임 |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책임서기 직함) |
후임 | 니키타 흐루쇼프(제1서기 직함) |
소련의 국무회의 의장 | |
임기 | 1941년 5월 6일 ~ 1953년 3월 5일 |
전임 |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
후임 | 게오르기 말렌코프 |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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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군무상 | |
임기 | 1946년 3월 15일-1947년 3월 3일 |
전임 | 이오시프 스탈린(군무인민위원) |
후임 | 니콜라이 불가닌 |
대통령 | 니콜라이 슈베르니크 |
총리 | 이오시프 스탈린 |
소련의 군무인민위원 | |
임기 | 1946년 2월 25일-1946년 3월 15일 |
전임 | 이오시프 스탈린(국방인민위원) 니콜라이 쿠즈네초프(해군인민위원) |
후임 | 이오시프 스탈린(군무장관) |
대통령 | 미하일 칼리닌 |
총리 | 이오시프 스탈린 |
소련의 국방인민위원 | |
임기 | 1941년 7월 19일-1946년 2월 25일 |
전임 | 세묜 티모셴코 |
후임 | 이오시프 스탈린(군무인민위원) |
대통령 | 미하일 칼리닌 |
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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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
별명 | 코바(Koba)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78년 12월 18일(1878-12-18) |
출생지 | 러시아제국 그루지야 인민자치 식민지 |
사망일 | 1953년 3월 5일(1953-03-05)(74세) |
사망지 | 소련 러시아 SFSR 쿤체보(현재 러시아 모스크바 시 자파드니 구 쿤체보) |
소속 | 붉은 군대 |
정당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1901년-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1903년-1918년) 러시아 공산당 볼셰비키(1918년-1925년) 전연방 공산당 볼셰비키(1925년-1952년)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1952년-1953년) |
배우자 | 에카테리나 스바니제(1906-07) 나데즈다 알릴루예바(1919-32) |
자녀 | 야코프 주가시빌리 바실리 스탈린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
종교 | 국가 무신론 |
서명 | |
군사 경력 | |
복무 | 소련 |
복무기간 | 1941년 ~ 1953년 |
최종계급 | 소비에트 연방원수 |
지휘 | 전군(최고사령관) |
주요 참전 | 적백내전 제2차 세계 대전 |
상훈 | #서훈 |
스탈린은 1923년 4월 30일부터 1924년 1월 21일까지 소비에트 연방 레닌 시대의 제2인자 겸 실권자였으며 1924년 1월 21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권력자였다.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조지아 출신으로 정교회 성직자를 꿈꿨으나, 공산주의 혁명 사상에 감화되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1], 공산주의 운동가·노동운동가가 되었다.
1924년 4월 3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는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을 지냈다. 1941년 5월 6일부터 1945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총리를 지내고 1945년 다시 총리에 재선되었으며, 1941년 7월 19일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방상을 겸하였다. 1945년 6월 27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는 소련군 대원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인 1939년에는 나치 독일과의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독일이 1941년 침공하여 발발한 독소전쟁 초기에는 제대로 된 군사정책을 발휘하지 못하여[2][3]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위협받았으나,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를 계기로 전세를 역전시켜, 결국 나치 독일군의 항복과 함께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철저한 정적 숙청과 동지들마저 반혁명 혐의로 숙청하여 그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경제발전과 계속된 승전 등의 성과를 바탕으로 철저히 우상화되었으나 죽음 이후,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강력한 비판을 받고 격하당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에는 공산주의의 변질과 정적 숙청을 자행한 독재자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 경제 사람들이 삶이 어려워지고 국가 위상이 곤두박침에 따라 스탈린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집권 이전에는 '선생님'이라는 애칭이 있었으나, 집권기간 중 스탈린은 '만능의 천재', '빛나는 태양', '삶의 지주', '위대한 조직자',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로써 찬양을 받았고, 한때는 러시아 정교회의 부주교로부터 공공연히 '우리의 아버지'로도 불렸다. 사후에는 공산주의를 변질시킨 독재자로 재평가받고 '조지아의 인간 백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의 수많은 가명 중 하나인 '스탈린'이라는 가명은 '강철'을 뜻하며, 트빌리시 신학교 시절의 필명으로 쓰던 것이 굳어져서 본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스탈린의 출생명은 조지아어로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조지아어: იოსებ 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러시아어: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Джугашви́ли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이며, 소소(조지아어: სოსო)는 그의 애칭이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