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작전 (1995년)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의 마지막 대규모 교전으로 크로아티아군의 공세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이 멸망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폭풍 작전(세르보크로아트어: Operacija Oluja 오페라치야 올루야[*])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마지막 작전이자 보스니아 전쟁의 결과에 큰 영향을 준 중요한 작전 중 하나이다. 폭풍 작전은 독립 선언을 한 준국가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에 맞서 630 km에 걸쳐 작전을 펼친 크로아티아 육군의 결정적 승리로 끝났으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에게 전략적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크로아티아군은 벨레비트산맥을 따라 진격하는 크로아티아 특수경찰과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군의 후방인 비하치 포위망에 위치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의 지원을 받았다. 폭풍 작전은 크로아티아가 영유권을 주장했던 전체 영토의 18.4%인 10,400 평방킬로미터의 영토를 수복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독립한 서보스니아 자치주를 점령한다는 목표로 개시되었다. 이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가장 큰 육상 작전이었다. 폭풍 작전은 1995년 8월 4일 새벽에 개시되어 1995년 8월 7일 저녁에 종료되었지만, 크로아티아군의 포위망에서 저항하는 세르비아계 잔여 세력을 소탕하기 위한 작전은 8월 14일까지 지속되었다.
폭풍 작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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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보스니아 전쟁의 일부 | |||||||
폭풍 작전 (1995년) 작전 개황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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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크로아티아 |
세르비아 크라이나 스릅스카 공화국 서부 보스니아 | ||||||
지휘관 | |||||||
프라뇨 투지만 즈보니미르 체르벤코 안테 고토비나 마르코 노라츠 페타르 스티페티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하리스 실라이지치 아티프 두타코비치 라힘 아데미 블라디미르 숄리치 |
밀란 마르티치 밀란 바비치 밀레 노바코비치 밀레 므르크시치 라도반 카라지치 라이코 카사기치 라트코 믈라지치 피크레트 압디치 | ||||||
군대 | |||||||
크로아티아 육군 크로아티아 특수경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 |
세르비아 크라이나군 스릅스카 공화국군 | ||||||
병력 | |||||||
130,000명 3,000명 |
27,000명~34,000명 4,000명~5,000명 | ||||||
피해 규모 | |||||||
사망자 174명~211명 부상자 1,140명~1,430명 포로: 3명 |
사망자 560명 포로 4,000명 | ||||||
민간인 크로아티아계 42명 사망 피난민 기타 평화유지군 4명 사망 |
폭풍 작전으로 비하치 포위전이 종결되었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 크로아티아 육군은 뒤이은 미스트랄 2 작전을 통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의 전세를 완전히 뒤바꾸었다. 95년 여름 작전에서 크로아티아군과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의 진격 덕분에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 크닌을 신속하게 점령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가 확보되었고, 1990년 세르비아 통나무 혁명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개입으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이 창설된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때부터 크로아티아 육군이 꾸준히 무장과 훈련을 한 덕분에 폭풍 작전이 개시될 수 있었다. 작전 이후 유엔의 실패한 평화유지작전과 크로아티아 분쟁을 끝내기 위한 정치적 노력이 뒤따랐다.
크로아티아군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군이 작전을 성공한 이유는 두 군대의 지속적인 군사 능력 향상의 결과이자 두 군대가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거점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돌파구 작전의 성공 덕분이었다. 작전 초기는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중요 거점이 함락되면서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사령부와 모든 방어 체계가 붕괴되며 빠르게 작전이 진행되었다. 폭풍 작전 직전에 크로아티아군이 보산스코그라호보를 점령하고 크로아티아 특수경찰이 그라차크로 진격하며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은 크닌을 방어할 수 없었다. 리카에서는 크로아티아의 2개 보위여단이 전략적 종심과 기동부대가 부족했던 세르비아 크라이나의 점령지를 차단하고, 카를로바츠 군단의 책임 지역으로 북진하기 위해 기동 부대를 배치했으며,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을 바노비나로 몰아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군을 상대하느라 예비군 부대를 기동할 수 없었던 세르비아 크라이나 바니야 군단도 글리나와 페트리냐에서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이 패배하자 같이 밀려났다.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은 전략적 예비대로 스릅스카 공화국군과 유고슬라비아군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두 군대가 작전에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다. 미국은 군사 컨설팅 회사인 MPRI(Military Professional Resources Incorporated)와 크로아티아가 크로아티아군의 자문, 훈련 및 정보 제공을 제공하는 국방부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작전에서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
폭풍 작전 동안 크로아티아군과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는 최소 174명에서 최대 214명의 사망자 또는 실종자가 발생했고,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은 56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4명의 유엔 평화유지군도 사망했다. 크로아티아군은 4,000명의 포로를 잡았다.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사상자 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크로아티아 측은 214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세르비아 측 자료에는 1,192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고 집계했다. 세르비아계 반군인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은 점령지에서 크로아티아인들을 상대로 인종 청소를 자행했는데 170,000명에서 250,000명의 크로아티아인들이 축출되고 수백 명의 크로아티아인이 사망했다. 폭풍 작전 기간과 이후 세르비아 크라이나가 장악하고 있던 지역에서 세르비아인 약 150,000명에서 200,000명이 도망쳤고, 크로아티아군은 남은 세르비아 민간인들을 상대로 다양한 범죄를 자행했다.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는 전쟁범죄 혐의와 세르비아인들을 크로아티아에서 몰아내기 위한 공동범죄집단에 가담한 죄로 기소된 크로아티아 장군 3명을 재판에 회부했지만, 세 명 모두 최종적으로 무죄가 선고되었고 재판부는 공동범죄집단 혐의에 대해 반박했다. ICTY는 폭풍 작전이 민간인들이 의도적으로 목표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인종 박해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ICTY는 크로아티아 육군과 특수경찰이 포격 이후 세르비아계 주민들에게 많은 범죄를 저질렀지만, 크로아티아 정부 및 군 지도부는 그들의 창설과 조직에 책임이 없으며 크로아티아가 세르비아계 소수민족을 대체하려는 구체적인 의도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인들의 귀환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기 위해 차별적인 조치를 취했다. 휴먼 라이츠 워치는 폭풍 작전 중 일어난 대부분의 학대는 크로아티아군에 의해 자행되었고 이후 몇 달 동안 대규모로 계속되었으며, 이는 세르비아계 민간인에 대한 즉결 처형과 세르비아계 재산의 파괴를 포함한다고 보도했다. 2010년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면서 폭풍 작전이 대량학살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15년 국제사법재판소는 폭풍 작전이 학살이 아니라고 판결하고 이전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의 판결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