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대륙 시기
1912년부터 1949년까지 존재했던 동아시아 나라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중화민국(중국어 정체자: 中華民國, 병음: Zhōnghuá Mínguó)은 1912년부터 국부천대하여 대만으로 옮긴 1949년까지 중국 대륙을 통치하였다. 1949년까지만 하여도 5억 4100만 명의 인구를 거느리며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였으며, 1971년에 유엔(UN)에서 중국의 대표권을 박탈당하기 전까지만 하여도 국제사회에서 중국 대륙 전체를 대표하는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받았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측에서는 중화민국이 대륙을 다스렸던 시기를 민국시기(民國時期)라고도 칭한다.
중화민국 | ||||
---|---|---|---|---|
| ||||
국가 |
| |||
진한 녹색으로 표시된 중화민국의 토지(1946년); 소유권이 주장되었지만 통제되지 않은 토지는 연한 녹색으로 표시된다. | ||||
수도 |
| |||
최대도시 | 상하이 | |||
인문 | ||||
공용어 | 표준 중국어 | |||
국어 | ||||
데모님 | 중국인[1] | |||
종교 | ||||
종교 | 중국의 종교 참고 |
중화민국은 1912년 쑨원이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신해혁명을 일으키며 최초로 건국되었다. 쑨원은 안정적인 지배력 확보를 위하여 당시 유력 군벌이었던 위안스카이와 손을 잡았고,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의 총통으로 즉위하였다. 위안스카이 총통은 자신의 주력인 북양함대를 기반으로 하여 독재 체제를 굳혀나갔고, 1912년 12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쑨원 주도의 중국 국민당이 승리를 거두자 결국 국민당의 지도자였던 쑹자오런을 암살시켰다. 위안스카이와 그의 동조자들이 중국 대륙을 통치한 이 시기의 중화민국을 북양정부라고 부른다. 위안스카이는 이후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시민들의 반발이 워낙 거세자 결국 황제에서 스스로 퇴위하였다.
군벌 시대가 도래하며 중국 대륙에 혼란이 가중되던 와중, 1921년에 국민당이 중국 공산당의 도움을 받아 광저우에 국민정부를 세웠고, 1925년에 쑨원이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은 장제스 총통이 북벌을 실시하여 1928년에 마침내 부패한 북양정부를 무너뜨리는 데에 성공하였다. 1927년 4월에는 난징에 수도를 둔 통합 정부를 구성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1927년에는 4·12 사건을 일으켜 상하이에서 공산당의 세력을 쓸어버리고자 하였다. 이는 중국 공산당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본격적인 국공 내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중국은 1930년대 동안 중화민국 주도의 산업화를 겪으며 나름대로 비약적인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나, 고질적인 군벌 간의 세력 다툼, 부정부패, 그리고 일본 제국과의 전쟁 때문에 그 성장에 제동이 걸렸다. 일본 제국은 만주사변과 뒤이은 내몽골 및 화북 지방 진출로 중국 대륙에 대한 진출을 지속적으로 시도했고, 이 결과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중일 전쟁은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하며 무조건 항복할 때까지 지속하였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중화민국 정부는 청일 전쟁 이후 일본에게 빼앗겼던 펑후 제도와 타이완섬을 되찾을 수 있었다.
중화민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1946년에는 공식 헌법까지 제정하면서 안정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는 일찍 찾아오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이 세력을 일으켜 국공 내전을 다시 지속하였고, 결국 1949년에는 중화민국 정부가 중국 공산당과의 여러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중국 대륙에 대해 통치권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중화민국은 수도를 난징에서 광저우로, 충칭으로, 청두로, 결국에는 타이완섬으로 건너가면서 타이베이로 천도하였다. 이로 인해 중화민국은 중국 본토에 대한 영향력 대부분을 상실하였으나, 하이난섬은 1950년까지, 티베트 지방은 1951년까지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