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드 바턴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에드먼드 바턴(영어: Edmund Barton, 1849년 1월 18일~1920년 1월 7일)은 1901년부터 1903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의 초대 총리를 지낸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인이자 판사이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고등법원의 창립 멤버가 되기 위해 사임했고,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근무했다.
에드먼드 바턴 Edmund Barton | |
에드먼드 바턴(1902년) | |
오스트레일리아의 제1대 총리 | |
---|---|
임기 | 1901년 1월 1일~1903년 9월 24일 |
군주 | 빅토리아 에드워드 7세 |
총독 | 존 호프 할람 테니슨 |
전임: - 후임: 앨프레드 디킨(제2대)
|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49년 1월 18일(1849-01-18) |
출생지 | 대영 제국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 글레베 |
사망일 | 1920년 1월 7일(1920-01-07)(70세) |
사망지 | 오스트레일리아 메들로바스 파츠포인트 |
국적 | 오스트레일리아 |
학력 | 시드니 대학교 |
정당 | 보호주의당 |
배우자 | 제인 바턴 |
자녀 | 6명 |
바턴은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 연방의 초기 지지자였으며, 그의 목표는 "대륙을 위한 국가, 국가를 위한 대륙"이었다. 헨리 파크스가 은퇴한 후, 그는 뉴사우스웨일스 연방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헌법 회의의 대표였으며, 국가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후의 국민 투표에서 연방을 위한 주요 운동가들 중의 하나였다. 1900년 말, 초기의 "호페툰 대실패"에도 불구하고, 바턴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첫 총리로서 임시 정부를 구성하는 데 위임되었다. 그의 임기는 1901년 1월 1일에 시작되었다.
1901년 3월의 첫 연방 선거에서, 바턴과 보호주의자들은 가장 많은 의석을 얻었지만, 과반수에는 한참 모자랐다. 그는 권력의 균형을 쥐고 있던 신생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ALP)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총리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바턴 정부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방군과 연방 공공 서비스를 포함한 새로운 국가 기관들을 설립했다. 그것은 전국적인 여성 참정권을 도입했고, 1901년 이민 제한법과 함께 백호주의 정책의 기초를 마련했다.
1903년 바턴은 정치를 떠나 그의 정부가 만든 고등법원의 세 명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앨프레드 디킨이 총리가 되었다. 법정에서 바턴은 자신이 집필하는 데 도움을 준 헌법에 대한 사법적 해석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