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1878-1938)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안창호(安昌浩, 1878년 11월 9일~1938년 3월 10일[2])는 대한제국의 교육개혁운동가 겸 애국계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다. 그의 사후 1988년 3월 21, 24일, 안창호가 공부한 구세학당 , 즉 경신중학교와 경신고등학교(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에 소속한 장로교회 학교)에서 그에게 명예 졸업장이 추서됐다.
안창호 安昌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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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모습 |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6대 국무령 | |
임기 | 1926년 5월 3일~1926년 5월 16일 |
부통령 | 없음 |
전임: 이동녕(제5대) 후임: 이동녕(제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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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출생일 | 1878년 11월 9일(1878-11-09) |
출생지 | 조선 평안도 강서군 초리면 초리7리 봉상도(도롱섬) |
사망일 | 1938년 3월 10일(1938-03-10)(59세) |
사망지 |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경성 제국 대학 부속 병원 |
국적 | 조선 대한제국 |
학력 | 1896년 구세학당 보통부 졸업 |
정당 | 무소속 |
부모 | 안흥국(부), 제안 황씨 부인(모) |
배우자 | 이혜련 |
자녀 | 아들 안필립, 안필선, 안필영 딸 안수산, 안수라 |
종교 | 유교 (성리학) → 개신교 (장로회)[1] |
별명 | 자는 치삼, 호는 도산 (島山), 산옹(山翁), 섬메, 신도생(新島生), 별명은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昊) |
웹사이트 | 도산 안창호 기념관 |
서훈 |
평안남도 출신이며, 본관은 순흥, 호는 도산(島山), 종교는 개신교이다. 구한 말 만민공동회에서 강연을 하였으며, 배워서 익히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영향력이 강대해지자 미국으로 망명, 이후 미국 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19년 상하이에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또한 실력양성론과 함께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실력을 키우는 것이 독립의 발판이라 생각해 1899년(광무 2년) 점진학교, 1908년(융희 2년) 대성학교, 1926년 중국 난징에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대한의군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사령관을 지낸 항일 독립운동가 안중근과는 동성동본 친족척이기도 하며 1938년 경상남도 부산에서 간경화를 비롯한 폐렴과 만성기관지염 및 위하수증· 복막염 및 피부염과 소화불량 등의 합병증으로 타계한 그는 생전에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등 재미한인단체를 조직, 주관하였고, 1919년 4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주도하였다. 1921년부터는 임시정부 창조론과 개조론이 나뉠 때 개조론을 주장하였으며, 국민대표자회의가 강제 해산된뒤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미국의 한인 교포사회의 지도자였던 그는 박용만, 이승만, 서재필 등과 경쟁, 갈등관계에 있기도 했다.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이후 일본 제국 영사관 경찰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송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형문을 받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했으나 소화불량과 간경화, 폐질환을 비롯한 여러 질병의 합병증으로 출옥 직후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