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1세 드 부르고뉴 공작
부르고뉴의 공작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샤를 1세(프랑스어: Charles Ier, 1433년 11월 10일 ~ 1477년 1월 5일)은 부르고뉴의 공작으로, 실질적으로 부르고뉴를 통치한 마지막 공작(재위: 1467년 - 1477년)이다. 용담공(프랑스어: le Téméraire) 혹은 담대공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간략 정보 샤를 용담공, 재위 ...
샤를 용담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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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은 1460년쯤 황금양모 기사단의 목걸이를 한 젊은 시절의 용담공 샤를을 그렸다 | |
부르고뉴 공작 | |
재위 | 1467년 6월 15일–1477년 1월 5일 |
대관식 | 1486년 4월 9일 |
전임 | 선량공 필리프 |
후임 | 부귀공 마리 |
신상정보 | |
출생일 | 1433년 11월 10일 |
출생지 | 부르고뉴 디종 |
사망일 | 1477년 1월 5일 (43세) |
사망지 | 로렌 낭시 |
가문 |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
부친 | 선량공 필리프 |
모친 | 이자벨 드 아비스 |
배우자 | 카트린 드 프랑스 이자벨 드 부르봉 요크의 마거릿 |
자녀 | 부귀공 마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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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치세에 부르고뉴 공국은 가장 크게 번성하였으며 독립된 왕국으로 만들어 왕위에 오르려고 노력하였으나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북부 알자스를 사들였고, 즈펜과 게일더스와 로레인을 정복하여 마침내 부르고뉴의 북부와 남부영지를 통합시켰다. 그러나 이로 인해 몇몇 유럽 강대국들의 적개심을 야기시켰고 부르고뉴 전쟁을 촉발시켰다.
로레인 공작 레네 2세와 계약한 스위스 용병들과 벌어진 낸시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프랑스의 루이 11세가 무력을 동원하여 자신의 아들 샤를(훗날 샤를 8세)과 마리(용담공 샤를의 딸)를 혼인시키려 했다. 그러나 마리는 막시밀리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한후 그와 혼인함으로 부르고뉴 공국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