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의 역사
역사의 측면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선사시대에서부터 토착민이 살았지만 브라질의 역사는 보통 포르투갈인이 건너온 뒤의 역사를 일컫는다. 1500년에 인도를 향한 포르투갈 원정대의 총사령관이었던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바이아주 남쪽 해안에 도착했고, 1530년부터 포르투갈 왕실이 새 땅에 대한 식민지 정책을 시행했다. 1548년에 총독부가 설치되었고 포르투갈 왕실과 귀족들이 세습 총독을 지내면서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
식민지 경제는 브라질 나무 염료 추출과 유럽계 정착민과 토착민들 사이의 거래로 시작했지만 점차 수출을 위한 사탕수수 재배가 주를 이루는 형태로 바뀌었다. 사탕수수가 더 많이 재배되면서 브라질 땅이 구세계의 교역로에 편입되었고, 지주와 선교사, 자유 이민자와 많은 아프리카계 노예가 정착했다. 17세기 말에는 브라질 내륙지역 정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수많은 금광이 현재의 미나스제라이스, 고이아스, 마투그로수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1789년에 포르투갈 왕실이 연체된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데하마라는 세금 징수법을 발표하였고, 빌라 히카 (지금의 오루프레투) 지역에서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려는 미나스제라이스의 반란이 일어났다. 1792년에 반란이 실패했고 리더였던 치라덴치스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1808년에 포르투갈 왕실이 나폴레옹의 군대를 피해 브라질로 천도하면서 마리아 1세의 아들 주앙 6세가 섭정 왕자로서 항구를 개항하고, 공장 가동을 허락하고 브라질 은행을 설립했다. 1815년에는 포르투갈 왕국의 한 식민지였던 브라질 부왕령이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브 연합왕국을 구성하는 왕국으로 바뀌었으며, 당시 국왕이던 마리아 1세가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브 연합왕국 국왕이 되었다. 1816년에는 마리아 1세의 죽음과 함께 섭정 왕자 주앙 6세가 왕위를 이어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아들 페드루 4세를 섭정으로 브라질에 남겨놓은 채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1822년 9월 7일에 페드루 4세가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브 연합왕국으로부터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며 초대 황제 페드루 1세로 즉위했다. 그는 겨우 다섯 살이던 아들 페드루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831년에 퇴위했다. 14세가 되던 1840년에 페드루 2세가 성년의 지위를 얻어 이듬해에 즉위하였고, 정권이 확실히 자리잡았으며, 1849년 프라이에이라의 반란을 끝으로 안정되었다. 같은 해에 노예 거래가 중단되었으며, 노예의 자리를 유럽계 이민자들이 매웠다. 지정학적인 맥락에서 브라질은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와 함께 파라과이 전쟁에 참가했다. 전투가 끝날 무렵에는 파라과이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다. 흑인과 메스티소의 참전이 노예제 폐지 운동과 군주제 폐지 운동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곧 1888년에 페드루 2세의 딸 황녀 이자베우가 황금법에 서명함으로써 노예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노예 주인들에게 아무런 보상을 해주지 않음으로써 황실은 마지막 지지 기반을 잃었다.
1889년에 육군원수 데오도루 다 폰세카가 공화정을 선포하고 구공화국이 시작되어 1930년에 제툴리우 바르가스가 집권하기 전까지 지속했다. 그때부터 브라질 역사의 꽃인 산업화가 일어났고, 미국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1964년에 움베르투 지 알렝카르 카스텔루 브랑쿠가 군사 정변을 일으켜 대통령에 취임했다.
군사 정권은 국가 전복 세력과 부패에 대항한다는 구실로 헌법에 규정된 권리들을 억압하고 언론을 검열·탄압했으며 정당들을 해체하고 양당제를 도입했다. 군사 정권이 끝난 뒤 1889년에 상·하원의원이 헌법 제정 국민 의회에서 개인의 권리 보장을 더 강화한 새로운 헌법을 만들었다. 브라질은 다시 민주화되고 경제적으로 발전하며 국제무대에 우뚝 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