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에 소요 사건
일본 쿠데타 시도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마쓰에 소요 사건(일본어: 松江騒擾事件 마쓰에소조지켄[*])은 1945년 8월 24일 일본 제국 시마네현의 현청 소재지 마쓰에시에서 청년 단체 "황국의용군"(일본어: 皇国義勇軍)에 속한 수십명이 무장 봉기하여 현내 주요시설을 습격한 사건이다. 이 일로 1명이 사망하였다. 마쓰에 소요 사건이라는 명칭은 일본정부에서 사용한 것으로, 황국의용군사건[2], 시마네현청 방화사건(일본어: 島根県庁焼き打ち事件 시마네켄초야키우치지켄[*])이라고도 불린다.[1] 이 사건은 태평양 전쟁 직후 일본의 항복에 반대하여 일어난 여러 소요사건 중 하나로,[3] 지방 도시인 마쓰에시에서 발생한 사건이지만, 일본 제국 시대에 일어난 전국적 규모의 동요가 목적인 마지막 쿠데타이자[4][5], 일본 제국 헌법에 따라 일본대심원에서 재판한 마지막 사건이기도 하다.[6]
마쓰에 소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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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일부 | |
위치 | 일본 제국 시마네현 마쓰에시 |
발생일 | 1945년 8월 24일 |
종류 | 살인, 방화, 무기 파괴, 주요 건물·시설물 불법 점거 |
수단 | 일본도, 38식 보병총, 총검, 다이너마이트 |
사망자 | 1명 |
공격자 | 황국의용군(皇國義用群) (오카자키 이사오(岡崎勳)가 주도) |
동기 | 태평양 전쟁(일명 "성전") 속행, 쇼와 유신(군국주의) 정부수립 및 왕정복고[1] |
1945년 8월 15일, 포츠담 선언에 따른 일본 제국의 항복이 쇼와 천황의 옥음방송(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 전 국민에게 발표되었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8월 17일 도쿄도에서는 항복에 반대하는 존양동지회 회원들이 미나토구의 아타고산에서 농성하며 전국에 봉기를 주장하는 소요사건이 발생하였다. 마쓰에 소요사건은 이 아타고산 농성에 호응하는 형태로 발생했다.[3] 존양동지회의 회원인 오카자키 이사오를 중심으로 20세 전후의 남녀 수십명이 "황국의용군"이라 자칭하며 8월 24일 새벽에 봉기하였고, 흩어져서 시마네현내의 주요시설을 모두 습격하였다. 시마네현청은 불에 소실되고, 신문사, 발전소도 그 기능이 일부 마비되었다. 사전 계획에서는 현지사와 지방검찰의 검사정(현:검사장)의 암살도 도모되었지만, 계획에 차질이 생겨 실패하였다. '황국의용군' 일당은 시내 각지를 습격한 후, 전국에 봉기를 주창하기 위하여 방송국에 모였으나, 방송국장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봉기대와 방송국장 사이의 말다툼이 계속되는 사이 도착한 경찰관과 일본군대가 방송국을 포위, 봉기대 전원이 모두 체포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시마네현 청사와 의사당 등 3,000m²가 타버려 192만 엔의 피해액[7]을 남기고 방화 당시에 주민 1명이 살해되었으며[1] 주요문서 등이 다수 소실되었다.[8] 또한 발전소 습격의 영향으로 마쓰에시내는 약 3시간 30분간 정전되었다.[9] 신문사도 습격의 영향으로 8월 31일까지 타블로이드판으로 신문을 발행하였다.[10] 행정·치안 당국을 비롯한 패전 직후의 시마네 현민에게 이 사건은 큰 충격을 주었지만[11] 보도관제의 시행을 통해, 이 봉기가 일본전역에 파급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5] 황국의용군의 주요 단원들은 복역이후 교육자나 인쇄회사직원, 산업폐기물처리업 등에 종사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고, 그 외의 단원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