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약탈 (1527년)
합스부르크 포위와 교황 로마 약탈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로마 약탈(1527)은 코냑동맹전쟁(1526~1530)이 진행 중이던 1527년 5월 6일에 교황령의 수도 로마를 침략한 신성로마제국군 가운데 일부가 통제에서 벗어나 로마 시내에서 무차별적으로 약탈을 자행한 사건을 말한다. 약탈로 인한 피해는 과거에 있었던 그 어떤 로마약탈(사코 디 로마)사건 보다 처참하고 컸으며 성도 로마는 도시로서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어 버렸다. 교황은 산탄젤로성으로 피신하여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였으며 산탄젤로 성에서 7개월간 자진하여 유폐 생활을 하였다.
로마 약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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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냑 동맹 전쟁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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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교황령 |
구아스탈라 공국 | ||||||
지휘관 | |||||||
교황 클레멘스 7세 (POW) 카스퍼 뢰이스트 † 렌초 디 체리 |
페란테 곤차가 부르봉 공작 샤를 3세 † 필리베르 드 샬롱 (WIA) | ||||||
병력 | |||||||
민병대 5,000 스위스 근위대 189 | 20,000 | ||||||
피해 규모 | |||||||
병사 500(사망, 부상, 포로) 시민 45,000(사망, 부상, 망명) | 미상 |
이 사건을 통해 코냑동맹군(프랑스,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교황령)과 신성로마 제국군간에 벌어진 코냑 동맹전쟁(1526~1530)에서 제국의 군대가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음이 드러났다. 결국 코냑 동맹전쟁은 1530년에 동맹군이 패배하여 제국군의 승리속에 종료되었다. 교황령에 대한 공격은 황제의 명령으로 수행되었으며 교황이 동맹결성과 전쟁을 주도하여 황제에게 정면으로 대항함에 따라 전쟁의 적대국가에 대한 응징차원에서 전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34)는 평소 황제에게 대적하며 친프랑스적이면서 편파적인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과거 1519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선출시 카를 5세가 황제로 선출되는것을 반대했었기에 묵은 감정에 대한 앙갚픔 성격도 있었다.
사건의 불똥은 엉뚱하게 잉글랜드로 튀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피해를 보았는데 그가 바로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재위1509-1547)다. 그가 왕비 캐서린과 이혼(혼인무효선언) 허락을 교황청에 요청하였으나 불허되었다. 보통의 경우에는 교황들이 국왕의 손을 들어주는 편이였으나[1] 이번 만큼은 그럴수 없었다. 그 이유는 헨리 8세의 왕비인 캐서린(생몰 1485~1536)이 바로 황제 카를 5세의 이모였기 때문이다. 황제 카를 5세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교황을 갈아치울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금번 로마약탈을 통해 그 위력을 과시한바 있다. 교황은 자신의 코가 석자인터라 이혼을 허락하지 말라고 계속 협박과 으름장을 놓는 황제의 뜻을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