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란트 진주
1936년 나치 독일이 비무장지대인 라인란트를 군대로 점거한 사건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라인란트 진주(독일어: Rheinlandbesetzung 라인란트베제충[*]) 또는 라인란트 재무장(독일어: Remilitarisierung des Rheinlandes)은 1936년 3월 7일 나치 독일의 군대가 베르사유 조약과 로카르노 조약을 정면으로 위배하여 라인란트 안으로 진입한 사건이다. 프랑스와 영국 모두 군사적 대응이 준비되지 않아 독일의 라인란트 진주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1939년 이후 호사가들은 1936년 당시 강력한 군사적 움직임을 보였다면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의 팽창주의적 계획을 막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대 역사학에서는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대중과 엘리트 양쪽 모두 군사 개입에 강력히 반대하는 여론이었으며 두 국가 모두 군대를 투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별 다른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고 평한다.[1]
베르사유 조약 | 19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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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제르맹 조약 | 1919년 |
소련-폴란드 전쟁 | 1919-1920년 |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 | 1919-1920년 |
트리아농 조약 | 1920년 |
라팔로 조약 | 1920년 |
프랑스-폴란드 동맹 | 1921년 |
로마 진군 | 1922년 |
코르푸섬 사건 | 1923년 |
루르 점령 | 1923-1925년 |
나의 투쟁 | 1925년 |
제2차 이탈리아-사누시 전쟁 | 1923-1932년 |
도스 플랜 | 1924년 |
로카르노 조약 | 1925년 |
영 플랜 | 1929년 |
대공황 | 1929년 |
만주 사변 | 1931년 |
만주국 대분란전 | 1931-1942년 |
제1차 상하이 사변 | 1932년 |
제네바 회담 | 1932-1934년 |
제1차 허베이성 전쟁 | 1933년 |
러허 사변 | 1933년 |
아돌프 히틀러의 권력 장악 | 1933년 |
탕구 협정 | 1933년 |
이탈리아-소련 협정 | 1933년 |
내몽골 작전 | 1933-1936년 |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 | 1934년 |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 | 1935년 |
소련-체코슬로바키아 상호원조조약 | 1935년 |
허메이 협정 | 1935년 |
영독 해군협정 | 1935년 |
12월 9일 운동 | 1935년 |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 1935-1936년 |
라인란트 진주 | 1936년 |
팔레스타인 아랍 봉기 | 1936-1939년 |
스페인 내전 | 1936-1939년 |
독이 협정 | 1936년 |
방공 협정 | 1936년 |
쑤이위안 작전 | 1936년 |
시안 사건 | 1936년 |
루거우차오 사건 | 1937년 |
중일 전쟁 | 1937-1945년 |
USS 파나이 사건 | 1937년 |
안슐루스 | 1938년 3월 |
1938년 폴란드의 리투아니아 최후통첩 | 1938년 3월 |
5월 위기 | 1938년 5월 |
하산호 전투 | 1938년 7-8월 |
블레트 협정 | 1938년 8월 |
비선전포고 독일-체코슬로바키아 전쟁 | 1938년 9월 |
뮌헨 협정 | 1938년 9월 |
제1차 빈 중재 | 1938년 11월 |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 1939년 3월 |
헝가리의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 침공 | 1939년 3월 |
1939년 독일의 리투아니아 최후통첩 | 1939년 3월 |
슬로바키아-헝가리 전쟁 | 1939년 3월 |
스페인 내전의 최후 공세 | 1939년 3-4월 |
단치히 위기 | 1939년 3-8월 |
영국-폴란드 군사 동맹 | 1939년 3월 |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 | 1939년 4월 |
소련-프랑스-영국 협상 | 1939년 4-8월 |
강철 조약 | 1939년 5월 |
할힌골 전투 | 1939년 5월 |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 1939년 8월 |
독일의 폴란드 침공 | 1939년 9월 |
소련의 폴란드 침공 | 1939년 9월 |
제1차 세계 대전 전후 라인란트는 연합국이 점령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라인강 서쪽 혹은 동쪽 50 km 이내 모든 영토에 병력 진출이 금지되었다. 1925년 로카르노 조약에서는 라인란트가 영구적인 비무장 지대임을 재확인했다. 1929년 독일의 외무장관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라인란트에서 연합국의 철수를 협상했다. 결국 1930년 6월 마지막 연합국 병력이 라인란트에서 철수했다.
1933년 1월 나치당의 독일 권력 장악 후 독일은 재무장과 라인란트의 무장화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1936년 3월 7일 히틀러는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을 구실로 독일 국방군 2만명을 라인란트로 진격하라고 명령했고 독일 전역에서 축제가 열렸다. 전쟁 위험을 원치 않았던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조약 시행을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라인란트 재무장과 독일 재군비 선언은 라인란트의 비무장 상태로 막혀 있던 서유럽 침략 정책을 독일이 다시 시행할 수 있게 도와주워 유럽에서 힘의 균형을 영국과 프랑스에서 독일로 바꿔놓았다.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하지 않아 히틀러는 두 국가가 나치의 외교정책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독일은 전쟁 준비와 유럽 지배 정책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2] 1936년 3월 14일 뮌헨에서 히틀러는 "위협도 경고도 내 길을 막지 못한다. 나는 몽유병자읩 본능적인 확신처럼 순리가 내게 부여한 길을 따를 것이다"고 말했다.[2]